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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알아보기

경주 남산 삼화령 석조불삼존상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

남산 삼화령 미륵불상

하늘의 두 개의 해, [도솔가]를 지어 재앙을 막다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을 공양하는데 쓰는 여섯 가지 물건이다. 향, 등, 차, 꽃, 과일, 쌀이 그것이다. 육법공양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8세기 중엽에 제작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에 있는 연기(緣起)법사의 발원문에서 처음 나온다. 요즘도 불상 앞에 이들 여섯 가지 공양물이 놓인다. 등이나 꽃 공양 등은 이미 석가모니 붓다께서 인간 세상에 계실 때부터 있어 왔지만, 차 공양은 아마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생겼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향 공양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선산의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집에서 몸을 숨기고 신라에 불교를 전하던 때에 보인다.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에서와 같이 차 공양에 대한 기록은 이보다 늦은 8세기 중엽에 충담(忠談)스님의 이야기에서 처음 확인된다.

즉, 경덕왕이 3월 3일,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서 다구[茶具]가 담긴 통을 둘러메고 오는 충담 스님을 본다. 경덕왕이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자, 충담스님은 해마다 중삼일[重三日, 3월 3일]과 중구일[重九日, 9월 9일]에 남산 삼화령(三花嶺)에 계시는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차를 끓여 올리는데, 지금 차를 공양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한다.

미륵불상에 차를 공양하였다는 기록는 [산화가(散花歌)]를 지은 월명(月明)스님과 얽힌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산화가]는 미륵불상에게 꽃을 공양하는 내용의 향가다. [삼국유사] ‘월명사 도솔가(月明師 兜率歌)’에 의하면, 경덕왕 때인 760년 4월에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떠서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자 월명스님을 불러 그 재앙을 없애고자 하였다. 이에 월명스님은 [도솔가]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용루에서 오늘 산화가를 불러 청운에 한 떨기 꽃 뿌려 보냈네.
龍樓此日散花歌 桃送靑雲一片花

은근히 굳은 마음에서 우러나 멀리 도솔천의 큰 선가를 맞았네.
殷重直心之所使 遠邀兜率大僊家“

[도솔가]를 부른 후에 그 재앙이 사라지자, 왕은 월명 스님에게 다구 한 벌과 수정 염주 108개를 주었다.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동자가 그것을 받아서 궁전 서쪽의 작은 문으로 나갔다. 왕이 그의 뒤를 쫓게 하였는데, 동자는 내원(內院)의 탑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다구와 염주는 내원 남쪽 벽에 그려 놓은 미륵보살상 앞에 놓여 있었다.

남산 삼화령 석조불삼존상. [도솔가]를 부른 후에 재앙이 사라지자, 왕은 월명 스님에게 다구 한 벌과 수정 염주 108개를 주었는데 순간 홀연히 나타난 동자가 그것을 받아서 내원(內院)의 탑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다구와 염주는 내원 남쪽 벽에 그려 놓은 미륵보살상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

충담스님이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 공양을 올렸다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세존은 어디에 있을까? 남산 삼화령에는 충담스님이 차를 공양하였을 법한 미륵불상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은 1925년, 삼화령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온 미륵불삼존상이 바로 이 불상이라고 생각한다. 100여 년 전의 사진을 보면, 삼화령 석실 속에 이 불상과 보살상들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화령 미륵세존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삼국유사] ‘생의사 석미륵(生義寺 石彌勒)’에서 확인된다. 즉 선덕여왕 때에 도중사(道中寺) 승려 생의(生義)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그를 데리고 남산에 올라가서 풀을 묶어 표시하게 하고는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청하건대 스님께서는 나를 꺼내어 고개 위에 안치하여 주시오’라고 하였다. 생의 스님은 꿈에서 깬 후, 그가 표시해 놓았던 곳을 찾아가 땅을 파 보니 돌미륵이 나왔다. 그 미륵상을 삼화령 위에 옮겨 놓고 선덕왕 3년(634)에 절을 짓고 살았는데, 절 이름을 생의사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삼화령의 삼화를 세 명의 화랑으로 생각한다. [삼국유사]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에서는 미륵여래를 화랑의 화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화가 세 명의 화랑이라면, 화랑이 미륵의 화신이므로 삼화는 결국 삼존의 미륵상이 된다. 실제로 경주박물관의 삼화령 미륵불삼존상은 명문이 없지만 주존이 미륵상 임에는 틀림이 없다.

협시보살상

불상이든 보살상이든 미륵상은 결가부좌한 좌상 형식으로는 거의 만들지 않는다. 미륵상은 주로 의좌에 앉은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두 다리를 나란히 아래로 내리는 의좌식(倚坐式), 발목을 교차하는 교각식(交脚式), 한쪽 발목을 다른 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반가식[半跏式, 반가사유상의 자세]이 있다.

삼화령 불상은 의좌식을 하고 있는 미륵불상이다. 양협시 보살상의 대좌를 제외하곤 모두 신라 7세기 중반에 만들어 졌다. 어쩌면, 생의사가 창건되던 선덕왕 3년(634)에 이들 불상도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삼존상은 모두 미소를 머금고 있는 큰 얼굴과 4등신의 통통하고 단아한 체구를 가진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도솔가]를 부른 후, 왕이 월명스님에게 준 다구와 수정 염주를 대신 가지고 간 바로 그 동자의 모습이 연상된다. 미륵불상의 오른 손에는 무엇인가 꼽았을 법한 구멍이 뚫려 있다. 미륵세존 앞에서 꽃을 공양할 때 떨어진 꽃송이를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발행일

발행일 : 2013. 06. 07.

출처

제공처 정보

  • 배재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하버드대학 방문학자, 대통령실 정책자문위원(문화재), 용인대학교 문화재대학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당대불교조각](2003), [중국의 불상](2005), [동양미술사](2006, 공저), [세상은 연꽃 속에](2006), [연화장세계의 도상학](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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